
툴렛 @ddd_iii_eee
사랑을 달아드립니다
“아무리 봐도 쳐졌어.”
거울 속의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훑고 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한 짝당 손바닥이 두 개는 들어갈 것 같은 넓은 가슴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가슴이었으나 서훈의 눈에는 한참이나 모자라 보였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가슴이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이 거울 앞에 선 가슴을 건드렸다. 탄력 있는 가슴에, 손가락이 파묻혔다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운동도 꾸준히 했다. 뻑뻑한 닭가슴살도 꾸역꾸역 섭취했다. 해외에서 직구를 하느라 배송비가 더 나간 단백질 파우더도 먹었다. 야근으로 집에 가서 침대에 딱 눕고만 싶을 때조차 헬스장에 나갔는데. 자신의 몸한테 배신감을 느낀 서훈이 어깨를 들썩였다.
많고 많은 부위 중 서훈이 가슴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대학교 때부터 짝사랑한 상대가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가슴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새내기들은 반드시 대면식을 나오란 소리에 억지로 나갔던 자리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술을 잘 마시게 생겼다며 서훈과 마주 앉은 선배마다 잔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건장하게 생긴 겉모습과 달리 서훈은 소심한 사람이었다. 거절도 하지 못하고 술을 전부 받아마신 서훈은 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알딸딸한 상태가 됐다. 요의를 느낀 서훈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술기운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간신히 볼일을 마친 서훈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들어가면 또 술을 주겠지. 서훈은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찮아?”
건물 뒤에 쭈그려 앉아 겨우 숨을 고르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두드려주었다. 몇 번 나눠본 적 없는 여자 동기였다. 서훈은 곧 그가 과대를 맡은 이임을 기억해냈다. 동기들을 챙기더니 따라나왔나 보다. 자신이 아니어도 일이 많아보이는 과대였다. 서훈은 괜히 신경이 쓰이게 하는 것이 싫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났다.
“괜찮아. 이제 들어가야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자마자 울렁거림이 밀려왔다. 스스로도 한계라고 생각했으나 서훈의 성격상 선배들ㅇ 집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더 어려웠다. 집에 가겠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 새삼스레 원망스러웠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발걸음은 옮기지 못하는 서훈을 보며, 혜연은 서훈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혜연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서훈은 다시 쭈그려 앉았다. 단체 활동은 질색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임은 더욱 싫었다. 대학은 다 이런 걸까.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자퇴 욕구가 밀려왔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데 그림자가 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 앞에 자신의 가방과 숙취 음료가 보였다.
“역시 안 괜찮네. 내가 너 취했다고 말해뒀어. 이거 마시고 집에 들어가.”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들은 서훈에게 기대는 경향이 있었다. 무리한 부탁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해내는 점 역시 서훈을 더욱 듬직한 남자로 오해하게 했다. 언제나 도움만 주다가 도움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방을 내미는 작은 손이 서훈을 이루는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단단했다. 그날부터 서훈의 눈은 언제나 혜연을 쫓고 있었다. 자신에게만 한정된 다정함이 아닌 걸 알았지만 이미 반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활달하고 다정한 혜연은 3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다른 학번보다 유난히 동기끼리 친한 서훈의 학번은 곧 4학년이 되면 같이 모여 놀 기회가 적을 것이라며 동기 MT를 기획했다. 새내기도 아니면서 무슨 동기 MT냐는 핀잔을 준 것치곤 어디로 가는지, 시간은 언제인지, 회비는 얼마인지, 모두 한마디씩 던졌다. 활발히 진행된 물음만큼 인원은 당초 MT를 계획했던 이들의 예상보다 늘어나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이름을 쓰라고 과사에 종이를 붙여놨었다. 평소의 서훈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참여 종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단체 활동을 싫어하는 서훈이 이름을 적은 이유는 물론 단 하나였다. 혜연이 참가하니까. 종이에 이름을 적으며 서훈은 결심했다. 이번엔 반드시 고백하자.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간 MT는 시작부터 술이었다. 사 들고 온 술은 진작에 동났고 근처 슈퍼에서 조달해 온 술 봉지 역시 텅 빈 속을 보이며 방바닥에 흩날렸다. 누군가 이대로는 또 술이 떨어질 테니 차라리 술 게임을 하자 제안했다. 새내기 때 지겹게 했던 게임은 오히려 학년이 올라가니 할 일이 없었다. 술 게임 특성상 제일 먼저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 구조였기에 지려고 하는 게 티가 나면 해당 종목 내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거라는 이상한 규칙이 추가되었다.
오랜만에 하는 술 게임은 각자 기억하는 규칙이 달랐다. 원체 단체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던 서훈은 가물가물하게 기억해낼 거리조차 없었다. 어설프게 시작되었으나 금세 게임에 집중한 이들은 어느새 승부에 집착해 술을 마시는 것보다 이기는 것에 연연했다. 점점 게임을 못하는 동기들이 나가떨어지고 많고 많은 인원은 줄어들어 채 열 명이 남지 않았을 때였다.
더는 멀쩡한 이가 없자 진실 게임과 비슷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던져진 질문에 돌아가면서 대답을 하다가 3초 안에 대답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임이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기초적이고 유치한 질문부터 사람 만한 바퀴벌레와 일주일 살고 1억 받기, 그냥 살기 등 별별 질문이 다 나왔다. 가장 마지막 질문이 카레맛 똥을 먹을래? 똥맛 카레를 먹을래였기에 질문자에게 정상적인 질문 좀 하라는 압박이 쏟아졌다.
“애인을 사귈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은?”
이정도면 괜찮다며 무난하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손이나 눈, 얼굴 등을 평범한 답을 말하는 동기도, 좀 더 대담하게 발목이나 몸매, 돈을 본다는 이도 있었다. 서훈의 대답은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치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서훈 역시 한참 취한 상태였다. 자신이 선배들한테 잘 말해주겠다며 씨익 웃던 혜연의 앞니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나왔다. 말을 하고 나서야 서훈은 눈치를 살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서훈이 입을 우물거렸으나 동기들은 전혀 수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입술도 아니고 이빨이 뭐냐고 놀렸고, 혜연 역시 그의 대답을 듣고 웃었다. 서훈이 말한 치아가 본인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치아라는 단어만으로 혜연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그날 일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속이 쓰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서훈 혼자만의 초조함이다. 차라리 좀 더 직접적으로 특징을 언급해야 했었나. 서훈이 뒤늦은 후회를 하는 동안 순서는 돌고 돌아 혜연의 차례였다. 그는 시원하게 자신이 가장 먼저 보는 곳을 외쳤다.
“가슴!”
혜연의 대답에 놀란 다음 상대는 대답하지 못해 결국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몸매보다 훨씬 노골적인 단어에 모두 혜연에게 집중했다.
“가슴이 뭐? 큰 가슴이 좋아?”
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크다 하고, 보자마자 손이 갈 것 같은 가슴이 좋아.”
다른 동기들이 변태라며 소리를 지르는 동안 혜연과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움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훈은 자연스레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몸을 키운 건 아니지만, 그 시절에도 또래 평균보다는 몸이 좋은 편이었다. 지금 내 가슴을 본 건가? 봤다면, 본 거라면, 본 거면... 술에 찰랑찰랑 잠긴 뇌는 그 이상의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물어져 오는 의식 끝자락에서야 내 가슴은 만지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이후로는 완벽한 꿈나라 속이었다.
1박 2일로 진행된 MT에서 첫날은 술을 마시느라, 다음날은 숙취에 시달리느라 결국 MT에서도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났다. 3학년을 마치고 서훈은 군대에 갔다. 다른 동기들이 1학년이나 늦어도 2학년에는 군대에 가는 것에 비해 늦은 입대였다.
서훈 자신도 늦게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혜연과 같은 수업을 듣고 싶어서 미루다 보니 3학년이 되어있었다. 아예 졸업하고 가고 싶다고도 생각했으나 4학년이 되기 전에 다녀오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입대신청을 해야만 했다.이렇게 오래 좋아할 줄 알았다면 차라리 1학년 때 가서 마지막 학기를 같이 다닐걸. 후회는 늦었고 서훈은 혜연과 동기들 대신 모르는 남자들과 18개월을 함께 했다.
복학했을 때 이미 혜연은 졸업한 뒤였다. 그래, 군대도 다녀오지 않고 고백을 하는 건 좀 아니었지. 스스로를 위로해보았으나 종내에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한 채 보냈던 사람이 우연하게 입사한 회사에 있었다. 게다가 둘이 아는 사이임을 알게 된 과장이 본래 내정된 사람 대신 그의 사수로 혜연을 붙여주었다. 자리 역시 옆자리였다. 이건 운명이야. 입사 첫날, 서훈은 퇴근하자마자 집 근처 헬스장을 등록했다. 목표는 물론 혜연이 만지고 싶어할 가슴이었다.
혜연은 동기일 때도 사수일 때도 그를 잘 챙겨주었고 대학생활 때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시간이 흐른 만큼 서훈의 몸 역시 좋아졌으나 관계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소심한 서훈의 성격이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도망을 쳤다.
그럴 때마다 서훈은 아직 가슴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며 자신에게 변명해야 했다. 트레이너에게 대회라도 준비하는 거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지만 애써 그 사실은 떠올리지 않았다. 본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키우고 있는 가슴이 혜연이 만지지도 않았는데 처지고 있다니. 출근하기 전 다시 한 번 제 몸을 살핀 서훈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축 늘어진 서훈과 달리 활기찬 목소리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혜연이었다. 그도 운동을 하는 걸까? 매일 헬스장을 가는 자신보다 훨씬 기운찬 모습이다. 다른 팀원들과 인사를 한 혜연은 서훈의 옆자리이자 본인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서훈을 쳐다보았다.
“서훈씨 안녕. 오늘은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네. 왜 이렇게 어깨가 처졌어?”
처졌어. 앞에 붙은 말은 서훈의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쳐졌다는 말만 귀에서 맴돌았다. 진짜 처졌나? 남들이 봐도 쳐진 걸까? 혜연은 가슴을 좋아하니까 민감하게 알아차린 걸지도 몰라. 졸지에 사람을 앞에 세워둔 채 서훈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서훈씨?”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그제야 이곳이 회사임을 자각한 그는 힘없이 웃었다.
“아뇨. 별 일 없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표정에 혜연이 좀 더 그를 캐물었으나 서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혜연이 본인 자리에 앉자 서훈은 다시 자기 가슴을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만지고 싶어지는 가슴. 대체 어떤 가슴이어야 하는 걸까.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거겠지.
입사 이래 혜연은 언제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지만 단 한 순간도 혜연은 자신의 가슴을 본다거나 만지고 싶어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서훈이 시선에 둔감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든 길에서든 종종 시선을 받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혜연이 쳐다보았다면 서훈이 못 느꼈을 리 없다. 정말 혜연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우울했던 하루가 끝나고 서훈은 평소처럼 집에서 따라 할 수 있는 상체 운동 영상을 눌렀다. 썸네일에는 딱 달라붙은 민소매를 입은 채 가슴을 활짝 펼치고 있는 남자는 저와는 다른 탄력적인 가슴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만질만한 가슴인 걸까? 서훈은 습관적으로 다시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이번 주 내내 그는 본인의 얼굴보다 가슴을 본 횟수가 더 많았다.
영상은 바로 시작하지 않고 광고가 붙었다. 5초만 지나면 넘기려고 했으나 서훈은 스킵하기를 누를 수 없었다. 시작부터 상의를 탈의한 남자의 가슴에 속옷을 채운 광고는 단 5초 만에 처진 가슴을 위로 끌어올렸다. 전에도 비슷한 류의 광고를 본 적 있었으나
이번 광고 대상은 여성이 아니었다. 서훈처럼 가슴 운동을 하는 사람이 타겟이었다.
드라마틱한 효과로 시작한 광고는 첫 부분과 달리 진지하게 흔들림과 가슴 처짐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러닝을 할 때 발생하는 흔들림 때문에 가슴이 처진다고? 광고를 보는 서훈의 마음도 흔들렸다. 서훈은 운동 영상 대신 상품 페이지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
상세 페이지에는 광고에서 봤던, 가슴이 많이 처진 사람 대신 좀 더 서훈과 비슷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모델을 하고 있었다. 속옷을 입고 운동할 시 가슴이 처지는 것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근육 펌핑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상품 설명을 보면 볼수록 솔깃했다. 하지만 남자가 브래지어라니. 이건 너무 유난 아닐까? 게다가 모양새도 범상치 않았다.
속옷은 무려 날개 모양이었다. 단순화된 귀여운 모양의 날개가 아닌, 현실 새의 날개를 닮은 속옷은 겨드랑이로 이어진 선부터 가슴 밑까지 받쳐주어 마치 발레복의 윗부분을 똑 떼온 것 같기도 했다. 일반적인 속옷보다도 화려한 모양새에 거부감이 부쩍 늘었다. 그러면서도 서훈은 뒤로가기를 누를 수 없었다. 아직은 거부감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아무리 작은 새여도 가슴이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스크롤을 좀 더 내리자 어째서 이런 모양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뜬금없이 새의 가슴에 대해 꺼낸 글은 새는 날기 위해 가슴 근육이 발달했으며, 거기서 착안하여 속옷을 날개 모양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가장 큰 날개 깃이 가슴의 가로를 잡아주어 옆으로 퍼지는 것을 막아준다, 가장 아래에 있는 깃은 탄력적인 소재로 되어 격한 운동 시에도 늘어짐 없이 받쳐줄 수 있다, 가운데 심지가 가슴이 짝짝이가 되지 않게 해준다. 속옷을 정말 날개 부위처럼 세세하게 나누어서 설명해 놓은 그림은 논리적이고 타당해 보였다. 점점 혹하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정작 구매하기는 꺼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누가 구매해?
‘흰색 : 5개 남음.’
별 생각 없이 구매란을 눌러본 서훈은 얼마 남지 않은 재고에 놀랐다. 후기글도 100개가 넘더니 알바가 아니었어? 광고 글 중반쯤 있던 이미 많은 사람이 구매한 후 효과를 보고 있단 말이 생각났다. 서훈은 더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결제까지 마치고 나서야 다시 한 번 잘한 일인지 고민을 했으나 눈앞에는 계속 자신의 가슴을 쥔 혜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어차피 속옷인데 누가 볼 일도 없잖아. 서훈은 후련한 마음으로 원래 보려던 영상으로 돌아갔다.
역시 브래지어는 좀 아니지 않나? 굳게 결심을 했던 전날이 무색하게 오전 내내 서훈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주문 취소를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것은 점심을 먹고 나자 취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서훈씨. 택배 왔던데? 자리에 갖다 뒀어.”
“감사합니다.”
습관적으로 인사를 한 서훈은 자신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택배? 내가 뭘 시켰... 기억이 난 서훈이 뛰듯이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한국의 배송시스템은 무척 빨랐다. 취소할까 고민하던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하루 만에 도착했다. 박스에는 다행히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송장에도 페이지에서 말했듯이 속옷 대신 잡화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럼에도 서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누가 상자 안 내용물을 알고 있을까, 근무시간 내내 택배가 신경쓰였다.
서둘러 퇴근한 서훈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자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자신이 주문한 것이 확실한 브래지어가 들어있었다. 제 가슴둘레에 맞춰 산 속옷은 한쪽 한쪽이 커서 정말 백조의 날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속옷을 들어내자 아래에는 착용법과 세탁법이 적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착용법을 꼼꼼히 읽었음에도 한 번도 착용해본 적 없는 속옷을 입는 손이 영 어색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무사히 고정 고리를 채우고 나자 끝도 없이 올라갈 것처럼 커 보였던 날개 깃이 겨드랑이를 지나기 전에 끝났다. 서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속옷 위에 민소매를 입고 셔츠를 걸치자 겉에서 봤을 때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속옷을 입은 채로 서훈은 오늘의 운동을 시작했다. 부디 돈을 허공에 뿌린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깃털 같은 희망으로 산 속옷은 효과가 좋았다.
“서훈씨, 요즘 운동해?”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으나 이렇게 직접 몸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봐도 속옷을 착용한 후 몸의 태가 더욱 좋아졌다. 기분도, 가슴도 처졌던 전과 달리 자신감이 쑥쑥 자랐다. 그러나 자라난 자신감도, 고백을 할 만큼의 용기를 주진 못했다. 여전히 서훈은 거울 앞에서 왔다 갔다하며 이 정도로는 부족할까 같은 생각만 했다.
서훈의 가슴은 원했던 곳에서는 제 활약을 못하고 정작 다른 곳에서 쓸모를 발휘했다. 사내 체육대회가 다가온 것이다. 여전히 단체 활동을 싫어하는 서훈은 최대한 참가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팀에서는 운동선수만큼 훌륭한 몸을 한 서훈이 응원단으로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새 서훈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자신도 모르는 새 다양한 종목에 출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잡다하게 많은 종목에, 전부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오후에 그가 참가할 종목에는 풍선 터트리기가 있었다. 아. 순식간에 서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큰일이었다. 체육대회인 만큼 격렬한 운동을 예상해 서훈은 오늘 속옷을 입고 왔다. 서둘러 그는 교체해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출전할 사람을 호명하는 방송이 나온 후였다.
죽을 자리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서훈은 무대에 올랐다. 파트너는 혜연이었다. 창백하게 질렸던 서훈의 얼굴에 빠르게 열기가 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연이랑 해야 한다니. 다른 때였다면 기뻤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혜연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고 싶었다.
“그럼 잘 부탁해.”
“응. 열심히 할게.”
펑.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자신과 혜연의 가슴 사이에서 첫 번째 풍선이 터졌다. 풍선이 사라지며 둘의 몸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바스락거리는 운동복의 촉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자신의 몸이 혜연에게 닿는 느낌이 나자 서훈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눈치챘을까. 그때부터 서훈은 전혀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 세게 껴안으면 몸이 닿는다, 그렇다고 풍선을 터트리지 않으면 계속 껴안고 있어야 한다. 애매하게 가해진 힘에 풍선이 자꾸만 몸에서 빠져 하늘로 통통 튀어 나갔다.
“아, 이 팀은 전혀 진전이 없군요. 선남선녀가 안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만 경기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세 좋던 출발과 달리 서훈팀이 전혀 진도를 나가지 못하자 사회자가 먹잇감을 찾은 듯 서훈과 혜연을 놀렸다. 멀리서 서훈에게 잘 좀 해보라는 소리가 들렸다. 서훈은 딱 죽을 맛이었다.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혜연의 팔과 시야에 가득 차는 얼굴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브래지어를 한 것을 들켰을까, 불안했다.
“지면 탐장님이 가만 안 둘 것 같은데.”
오늘 우승팀에게 주는 보너스의 금액을 어디서 들었는지 아침부터 팀장의 열의가 대단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서훈의 어깨를 두드리던 팀장의 눈이 생각났다. 하지만 닿으면 속옷이... 서훈은 아무 변명이라도 생각해내야 했다.
“미안, 그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곤란해하는 서훈을 보며 혜연은 그에게 더 묻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 맡겨.”
언제가의 그날처럼 시원하게 웃은 혜연이 힘있게 그를 껴안았다. 서훈이 머뭇거리든 놀라든 혜연은 거침없었다. 팡팡, 연속으로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다른 팀을 따라잡더니 결국 우승까지 했다. 경기가 끝나자 서훈은 혼이 나갔다. 속옷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을 힘껏 가둔 따뜻한 체온만이 생각났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부서별로 이루어진 체육 대회는 서훈팀의 승리로 끝났다. 사장의 긴 폐회사 끝에 팀장이 대표로 나가 상금을 받아왔다. 모두 신이 나서 사장님이 준 두둑한 금일봉을 들고 회식 자리로 향했다.
서훈은 간절하게 중간에 빠지고 싶었으나 팀원들은 오늘의 MVP를 쉽사리 보내주지 않았다. 1차, 2차를 거쳐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서훈은 거나하게 취해 간신히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은 몸보다 훨씬 취해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가 데려다 줘야겠다는 소리에 혜연이 선뜻 손을 들었다.
“정말 혜연씨 혼자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저 힘 세요!”
빈말이 아닌지 혜연은 서훈의 몸이 거의 제게 기대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주저하긴 했으나 이미 늦은 시간에 모두 체육 대회로 인한 피로로 절어있었다. 결국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길거리에 남은 것은 혜연과 서훈뿐이었다. 혜연은 한 손으로는 서훈을 붙든 채 택시를 불렀다.
위치를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훈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연이 데려다 준다니. 서훈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갈 수 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잠들지 않게 기를 쓰는 것이 최선이었다. 혹시나 옆에 앉으면 브래지어에 대해 물어볼까 봐 술자리에서도 근처에 가지 않았다. 단 둘이 남은 지금, 이대로 잠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잠들고 나면 혜연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기에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서훈아, 집 주소 좀 말해봐.”
택시가 오자 서훈이 힘겹게 주소를 말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서훈을 택시에 밀어 넣은 혜연이 기사에게 그 대신 주소를 말했다. 옆자리에는 서훈이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저러면 속만 더 울렁거릴 텐데. 그로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하는 행동일 테지만 잔뜩 취했을 때는 이미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졸리면 자. 집에 도착하면 깨워줄게.”
“부탁할게.”
그제야 서훈이 눈을 감고 창에 머리를 기댔다. 금세 색색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혜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실 노래 가사는 전혀 혜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풍선 터트리기를 했을 때부터 혜연은 자신에게 닿았던 서훈의 감촉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늦은 저녁의 도로는 뻥뻥 뚫려 서훈의 집에 금세 도착했다. 혜연이 서훈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시원한 창에 머리를 대고 있어서였는지 눈을 뜬 서훈은 택시에 타기 전보다는 멀쩡했다. 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이대로 택시를 계속 타고 집에 갈
것을 권했다.
“아냐. 아까 보니까 다리도 막 풀리더라. 혹시 모르니 집까지 데려다 줄게.”
“정말 괜찮은데.”
몇번이나 사양하던 서훈은 혜연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내렸다. 아파트 단지 입구와 가까운 동에 사는 서훈의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좀 전까지 혜연에게 집에 가라고 했던 것과 달리 금세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아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웃겼다. 집에 들어가려는 자신을 혜연이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잠들어 행복한 주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오늘도 혜연이 다정했다는, 짝사랑 스택을 한 층 더 쌓으며.
“오늘 고마웠어. 조심히 들어가.”
“아냐. 별로 힘들지도 않았는걸. 그런데 잠깐 집에 들어가도 돼?”
“왜, 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며 웃는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올 게 온 것인가. 행복한 기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날 물어보면 안 될까...? 오늘은 조금 피곤한데...”
사실은 다른 날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서훈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모면하고 싶었다.
“미안해. 진짜 금방 끝나니까.”
“하아... 알겠어.”
언제나 말하지 않아도 서훈의 상태를 잘 알아채던 혜연이 거절의사를 비췄음에도 밀어붙이자 서훈은 별 수 없었다. 속으로 울상을 지은 그가 몸을 틀어 혜연이 들어올 공간을 내어주었다. 혜연이 웃으며 서훈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저절로 서훈의 몸이 긴장되었다.
“그럼 실례할게.”
문을 닫고 돌아선 서훈의 가슴을 혜연이 덥석 쥐었다. 실례의 대상은 아무래도 남의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금 행동 때문에 한 말인 듯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서훈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분명 목표로 하던 상황임은 맞는데...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새하얘진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나 서훈의 상상은 혜연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에서 끝났기에 그 후의 상황은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역시.”
궁금증이 해결되었다는 듯 혜연이 미련 없이 서훈의 가슴을 놓아주었다. 그제야 서훈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안에 티만 입고 있는 게 아니지?”
“그게 말이야..”
혜연은 참을성 있게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무뚝뚝하지만 성실하단 소리를 듣는 제 대학 동기이자 직장 후배가 숫기가 없다는 사실을 혜연은 오랜 관찰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브래지어를 했다니. 소심한 모습 뒤에 엄청난 성적 취향을 숨기고 있던 걸까. 과 CC는 안된다, 사내연애는 안된다, 서훈을 보며 참을 인을 백번은 새겼던 혜연의 이성이 흔들렸다.
“네가, 네가 보기만 해도 만지고 싶은 가슴이 좋다고 해서..”
잘못을 고백하는 것처럼 서훈은 울기 직전이었다. 5년 전 혜연이 했던 말을 자신이 하려니 부끄러웠다. 내가 하려던 고백이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울고 싶은 서훈과 달리 혜연은 속으로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혜연이 상상했던 어마무시한 상상에 비하자면 서훈의 대답은 훨씬 얌전했으나 혜연은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저 넓은 가슴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브래지어를 한 거라고?”
서훈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치심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속옷을 찬 건 절대 아니야! 이걸 하면 근육 성장에 좋다고 해서, 그래서...”
필사적으로 서훈이 자신을 변명했다. 허, 참.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추임새가 혜연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혜연의 속내를 모르는 서훈은 혜연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라 여겼다. 혹시라도 소문이 퍼질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진 않더라도 혜연 본인은 자신을 피할 터였다. 날 변태라고 생각하겠지. 눈 앞에 있는 이가 진짜 변태임을 몰랐기에 이미 혜연이 서훈을 피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봐도 돼?”
“뭘...?”
“안에 입은 거.”
“그, 그게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보고 싶다며 다가오는 것에 안심하기에는 상황이 무서웠다. 어느새 혜연의 인도로 문앞에서 거실로 자리를 옮긴 둘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에 서훈이 오히려 손님으로 온 것 같았다.
혜연은 정말로 보고 싶은지 서훈이 상의를 벗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내어주기도 전에 가슴부터 내어주게 생긴 서훈의 이성이 옷을 벗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혜연을 그리며 8년을 앓던 사랑이 술을 마신 덕분인지 용감해졌다. 감정은 이성을 저 멀리에 내다 꽂고 서훈의 멱살을 쥐었다.
‘당장 벗어.’
짝사랑에 지친 서훈이 감정의 편을 들어주었다. 대신 혜연에게 거듭 다짐을 받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지?”
“당연하지.”
이상하게 생각하기는커녕 확실히 들뜬 목소리였다. 마음을 다 잡은 서훈이 저퍼에 손을 올렸다. 셔츠를 입던 평소와 달리 집엎 위에 편한 면티를 입었기에 시간을 끌 만한 것도 없었다. 서훈이 유일한 방어수단인 지퍼를 느릿하게 내렸다. 지켜보고 있던 혜연은 대신 벗겨주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어도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서훈은 자신이 이이상 공격적으로 나오면 놀라 도망갈 남자였다.
“와.”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서훈의 벗은 상체를 눈앞에 둔 혜연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정확하게 맨 가슴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서훈에게 지옥행 열차를 선물해줬던 브래지어가 서훈의 가슴을 곱게 감싸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걸 입을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굉장한 모양새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날개 모양 천 위에 똑같이 자신의 손을 포개고 싶었다. 혜연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가슴이 처음부터 날 위한 거였단 말이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 오히려 좋은데.”
모든 것이 좋았다. 양손으로 들어도 넘칠 것 같은 가슴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얼굴도, 여전히 서훈을 처음 봤던 그날처럼 혜연의 취향이었다.
“아, 정말 사내 연애는 안 하려고 했는데.”
혜연이 서훈을 안았다. 풍선을 사이에 두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면적이 혜연에게 닿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자신을 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유일하게 천이 덮이지 않은 가슴 정중앙에 혜연이 자신의 이마를 부볐다.
“이미 가슴까지 만진 뒤에야 말하는 게 웃기지만, 서훈아. 나랑 사귈래?”
빠르게 뛰다 못해 방망이질 하는 심장이 말을 잇지 못하는 주인을 대신해 답을 했다. 가슴을 들썩이는 서훈에게 진정하라며 혜연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흑심이 절반 가까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견갑골을 타고 퍼지는 다정함에 속은 서훈이 둑이 터진 것처럼 사랑을 속삭였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순서가 엉망이 된 연애의 시작이었다.
회사에서는 비밀로 하려 했으나 서훈이 전혀 숨기질 못해 실패했다. 팀원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사귀나 했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민망하면서도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내 커플 탄생을 핑계로 회식한 밤에, 서훈은 속옷 사이트에 삼 개월이나 늦은 후기를 남겼다.
‘효과가 정말 좋네요. 덕분에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