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오면 묻혀 있는 기억이 떠오르고는 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어린 시절 날 좋아해 줬던 한 아이에 대한 기억이라든지.
그 기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 아이가 서 있으면 난 그 앞에 서서 이별을 고하고 이별이란 말을 들은 아이는 날 붙잡지만 난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게 죄책감이란 이름으로 새겨져 잊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떨리던 목소리가,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라며 흔들리던 눈동자가 아직 잊히지 않는다. 왜 잊히질 않는 걸까, 약간 떨린 듯한 목소리가 시린 방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내게 잊을 수 없는 환청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은 내가 그 아이의 날개를 꺾어버렸기 때문이라고.
-
다음날.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비 냄새가 진하게 풍겨와 나는 또다시 그 기억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그날보다 조금 더 이전의 기억,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었다.
내가 중학생일 시절 난 도서 위원이었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기도 했고 다른 반으로 떨어진 친구들과 같이 할 만한 것이라곤 도서 위원밖에 없었던 지라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난 친구들보다 더 일찍 도서관에 도착하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유독 더 일찍 도서관에 도착한 날이었다.
“여기서 뭐해?”
우리 학교 도서관은 내가 갈 즘엔 항상 문이 열려있었다. 그때마다 난 선생님이 일찍 오신 거라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그날은 분명 급식실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온 길이었음에도 문이 열려있던 지라 호기심에 도서관 안을 살펴봤었다.
그리고 난 거기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남학생을 발견했다.
도서관에는 유일하게 담당 선생님과 도서 위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이젠 거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 안쪽 낡은 소파에서 한 더벅머리의 남학생이 몸을 뉜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에 너무 집중한 건지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종소리가 들렸을 테니 긴장할 법도 한데 여전히 책에만 집중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 남학생은 자신이 그곳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
-으아악!
그 남학생은 내가 말을 걸어서야 내 쪽을 돌아봤고 놀란 나머지 소파 끝에 위치한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 직후 도서관이란 걸 의식한 듯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소리는 질려진 후였고 내 친구들이라 추정되는 사람들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남학생은 당황한 듯 자신이 읽던 책을 챙기며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내 친구들은 믿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추궁했지만 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저 남학생이 다시 돌아올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
부운 눈가를 비비며 일어나자 지난밤 비라도 내렸는지 비 냄새가 진하게 났다. 너와 처음 만난 날에도 비가 내렸는데. 다시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떠오르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너에 대한 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가 중학생일 시절, 난 도서관에 가는 걸 즐겼다. 점심시간을 반에서 보내기엔 그렇다 할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반에서 겉도는 느낌이 있었기에 반에 있는 것보단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우리 학교 도서관에는 담당 선생님도 잘 들어가지 않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시절 난 워낙에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던 지라 거기 있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으면 아무도 내가 거기 있는 걸 몰라 더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다.
-여기서 뭐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물론 도서관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이 방까지 들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심하게 놀란 감이 없지 않아 있었고 결국 비명까지 질려버렸다. 물론 그 직후 손으로 입을 막으며 아무도 듣지 않았길 빌었지만 이미 누군가 내 비명소리를 들은 듯 급하게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망했다. 나는 급하게 읽던 책을 챙겨 도서관을 빠져나갔고 역시나 문 앞에는 도서 위원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서 있었다.
그 아이들은 비명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안다는 듯 날 빤히 쳐다봤지만 난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다시는 도서관에 가지 못할 거란 사실에 화가 나 평소보다 걸음을 빠르게 했다. 게다가 마침 비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발견했을 때보단 아니었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
난 어릴 때 비 오는 날을 싫어했었다. 우울하고, 침울하고. 무엇보다 글자도 잘 안 보이고. 물론 중학생 시절에도 비 오는 날은 싫어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 그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고 그저 비가 오면 생기는 것들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아이는, 비하고 온 것들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었다.
“ ... ”
없겠지? 도서관 문은 여느 때와 같이 잠겨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어제 본 그 아이는 머리카락 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다는 걸 떠올린 나는 검은색 가구를 위주로 다시 살펴봤고 그럼에도 없다는 결과가 나오자 그제서야 안심이 돼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두었다. 하필이면 빌리지도 않은 것을 가져갔던 거였는지라 담당 선생님이 소파에 쪽지라도 남겨뒀다면 어쩌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알아차리진 못한 듯 소파 주변에는 쪽지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원래 이 방은 다 망가져 읽을 수 없는 책을 보관하는 방이었으니까.
-어, 오늘도 왔네?
안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발이 빠른 편이구나. 적어도 이틀 정도는 안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놀랐다면 놀랐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책을 들고 가긴 했었어도 표지가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이 방에 있던 책 같았고.
좀 더 나중에 와도 별문제 될 건 없을 텐데, 계속 생각을 이어나가던 중 갑자기 무언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한 듯 방을 나가려고 하기에 덩달아 나도 방을 나섰다. 책 읽으러 온 거 아니었나? 도서관 문 닫으려면 점심시간은커녕 2교시는 더 지나야지 닫을 텐데.
“ 너 어디 가? ”
책 읽으려고 온 거 아니야? 그래서 물었더니 상대는 오히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날 돌아봤다. 그럼 도서관에 책 읽으러 오지 왜 오냐며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자 오히려 이상한 말만 늘여놓아 어이가 없던 걸 기억한다. 여기 있어도 된다거나, 대충 그런 거.
그때까지는 몰랐다. 다친 날개를 고쳐주면 그 새가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 그러니 이 기억은 그다지 떠오르고 싶지 않다. 자신이 고쳐줬다 꺾다니, 너무 이기적이지 않나.
" .. 날 잊었다면 좋을 텐데. "
제발. 난 상처투성이의 날개를 볼 자신이 없었다.